패션 인사이트/Column

생 로랑, 천재와 그의 브랜드의 탄생 Yve Saint Laurent

버클 2021. 11. 25. 18:29

 

여러분은 살면서 천재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사실 노력파여서 천재랑은 항상 거리가 멀었어요
천재와는 거리가 멀지만
저는 정말 좋아하는 천재가 있습니다

만약 패션계에서 천재를 뽑는다고 하면,
그중에서도 절대 빠질 수 없는 디자이너가 있다면
바로 이브 생로랑이죠

20세기 최고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물론 최고의 디자이너임과 동시에
천재라는 수식어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의
생로랑 (Saint Laurent)입니다.

Photo ©museeyslparis Birth and Early Years on the Île d’Oléron

 

이브는 1936년 알제리의 오랑이란 지역에서 태어났어요
당시 알제리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죠
이브는 북아프리카인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을 받으며 자랐어요
그 기억들이 나중에 그의 특유의 색감과 에스닉룩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해요

그렇지만, 이브는 연약한 몸에 소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그 시절 동급생들로부터 굉장히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고 해요
그리고 오랑에서 동성애는 살인자와 다름없는 범죄자 취급을 당한다고 하죠

아시다시피 이브는 동성을 좋아했어요
그래서인지 이브는, 그가 살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떠난 이후
다시는 오랑에 돌아가 보지 않았다고 해요

Photo ©museeyslparis Paper Dolls

 

이브는 아버지가 극장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이었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무대극의 의상도 많이 보고
공연도 자주 보았습니다

열한 살 무렵부터 이브는 공연들을 보고 나서는
종이 인형들을 만들어 화려한 의상의 무대극을 재현하곤 했어요

그러다 종이 인형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는지
어머니의 옷을 재료로 하여 봉제인형의 옷을 만들기 시작했고
추후에는 봉제인형을 넘어서 그의 어머니와 자매들의
드레스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고 해요

Photo ©museeyslparis Paper Dolls

 

그렇게 그는 10대를 계속해 옷을 디자인하며 보냈어요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이런 이브의 능력을 믿어줍니다
1953년 프랑스에서 열린 패션 디자인 콘테스트에서
아무런 교육 경험도 없는 17살의 한 소년이
쟁쟁한 신진 디자이너들을 제치고
3등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물론 그의 천재성도 있었지만

그의 천재성을 위해 수많은 드레스들이 잘려 재료가 되어도
끝까지 그를 믿어주었던 어머니의 서포트도 중요했겠죠

Photo ©museeyslparis First Visit to Paris

그는 당시 저명한 디자이너인 크리스찬 디올과 지방시 등이 심사하는
국제 콘테스트에서 3등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뛰어난 실력을 눈여겨본 사람이 있었죠
보그(Vogue)의 편집장인 미셸 브뤼노프는
이브를 불러선 이브가 훗날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는
엄청난 칭찬을 하며 패션학교의 진학을 권유합니다

그렇게 엄청난 칭찬을 들은 이브는 들뜬 마음으로 파리 의상 조합에 진학하지만
따분한 수업에 흥미를 잃고 몇 달 만에 관두게 됩니다
(천재에게서 맛보는 나와의 유일한 공통점)

얼마 후 패션 디자인 콘테스트가 다시 열렸고
이번에는 칵테일 드레스를 디자인해 18살 나이에 1등을 차지합니다

Photo ©museeyslparis Debut at Dior

보그의 미셸 브뤼노프가 다시 그를 불러냅니다
그는 그동안 이브가 어떤 디자인을 했는지 이브의 스케치를 보았죠
그런데 이브의 디자인들은 당시 디올이 브뤼노프에게만 비밀리 보내줬던
새로운 시즌의 스케치와 너무도 유사했고, 경험 없는 어린 학생이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디올과 같은 아이디어를 냈다는 사실에 놀라 자빠집니다

브뤼노프는 "평생 살면서 그런 재능은 본 적이 없다"라며
그렇게 이브를 디올에게 데려가고
디올 역시 그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채 그를 자신의 어시스턴트로 채용하죠

당시 프랑스 패션 매출의 절반 이상이 크리스찬 디올에서 나온 점을 감안하면
이는 엄청난 기용이죠

Photo ©museeyslparis The Youngest Couturier in the World

그렇게 이브는 당시 파리 최대의 패션하우스에서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크리스찬 디올이 발표한 80벌의 드레스 중
무려 50벌의 디자인을 직접 해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꿈만 같던 대기업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57년
본인을 데려온 든든한 크리스찬 디올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디올의 죽음은 당시 패션계와 이브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이브에겐 더욱 큰 충격의 사건이 생깁니다
바로 디올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수석 디자이너의 자리를
경영진들의 인정으로 이브가 맡게 된 것이죠

그렇게 이브 생 로랑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크리스찬 디올이라는 거대 오트 쿠튀르 하우스를 이끌어 가게 됩니다.

어쩌면 얼떨결에 맡게 된 수석 디자이너의 자리였지만
천재의 디올 컬렉션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쇼가 끝나고 파리 시민들은 이브 생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환호했고 이는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도 가져다주었어요

Photo ©museeyslparis Pierre Bergé: The Meeting

 

첫 번째 컬렉션을 성황리에 마친 후 이브는
크리스찬 디올 실무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이후 이브와 50년 동안 함께하며 친구이자 연인, 사업 파트너가 될
피에르 베르제를 만나게 되고 점차 연인 사이로 발전하게 됩니다.

1954년, 알제리는 프랑스에 대항해 독립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당시 이브는 디올을 성공적이게만 이끌어 가지는 못했지요
이브는 항상 엄청난 시도의 룩들을 선보이려고 노력했기에
기존 디올의 주 고객층인 상류층 귀부인들에게는
너무 급진적이라는 평들이 많아요

이전에는 당시 디올의 오너인 마르셀 부삭, 패션계 인사, 언론 등등이
정부에게 압박을 넣어 이브의 군대 징집을 막아주었었는데
이렇게 상류층 귀부인들에게 인기가 주춤하자
마르셀 부삭은 이브를 전쟁에 참전 시켜버리고
이브가 군에 있는 사이 수석 디자이너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힙니다

이브는 그렇게 입대 후 정신적으로 힘들어했고
군에서는 그런 이브를 입대한지 3주 만에 정신병원에 보내버리죠

이 시절 이브는 각종 신경 안정제 투여와 전기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이유들로 이브에게 정신병과 약물 의존증이 생겼다고 해요

Photo ©museeyslparis Creation of the Yves Saint Laurent Haute Couture House

"당신은 천재니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정신병원 안에서 무단 해고 소식을 들은 이브는 정말 힘들었겠죠
그런 이브에게 연인이었던 피에르는 이브를 위해,
둘이서 이브의 오트쿠튀르 브랜드를 만들자고 합니다

이브가 본인의 디자인에만 몰두할 수 있게,
유약한 이브 대신 모든 비즈니스를 도맡아 하죠

그렇게 피에르는 이브를 대신해 디올을 고소하고
소송에서 이겨 거액의 소송금을 받아냄과 동시에
그에게 투자할 후원자까지 찾아오죠

@vanillawalk 002-yves-saint-laurent-pierre-berge-theredlist

세계적인 패션하우스 생로랑은 연인의 사랑으로,
그렇게 세상에 처음 피어나게 됩니다